나에게 세상이란 여전히 어둡고 무거움이 가득한 안개 속의 미로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지만 시야의 각도를 조금 뒤튼다고 해서 달라질 만큼 상황이 좋지도 않다. 그렇다고 매일 매시간을 니힐리즘*허무주의를 이르는 말에 절어 살지는 않지만, 사실 흥분과 감격, 감동이 무엇인지 잊은 지 오래다.

그런 나조차도 입안 가득 달달함에 몽글몽글해지는 순간이 있다면 혀를 굴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울컥해지는 단어 중 ‘부모님’을 읊을 때이다. 붙어 살 때는 틈만 나면 이게 싫다, 저게 싫다 그랬던 것을 떨어져 사니 이것도 좋았고 저것도 좋았더랬다. 단지, 함께 지내면 ‘소중함을 잊는 병’이 도질 뿐.


그리고 애타게 낳아 기르시고 함께 울고 웃으며 밤을 지새운 이는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만큼이나 기쁨과 슬픔을 나누었던 ‘은사님’이 나는 ‘님’ 자 중 버금이지 싶다. 언젠가 내가 존경하는 교수님 중 한 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모든이의 삶에 존 키팅과 같은 교사가 있다면 좋겠다.
(C) Dead Poets Society

교수는 나의 직함일 뿐이지 나는 제자들의 선생으로 살고 싶다.
그게 배움과 가르침을 하는 이들의 이름이다.




그 때는 그 분이 정말 멋진 철학을 가지셨구나 정도로 그쳤지만, 한 두 해 나이를 먹어서도 자꾸 전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때마다 호되게 꾸짖어 주기도 하고 함께 아파하고 기도해주셨던 선생님이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고등학생 때 나는 인생에서 가장 답답한 미로에 발을 딛고 있었다. 원래 삶이란 게 미로의 끝을 찾았을 때 발견하는 것이 ‘여기서부터 미로의 입구’ 라지만 그 때는 지나칠 정도로 힘에 부쳐 말로만 되뇌이던 ‘끝’이 보고 싶어졌다.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다고 부모님께 말했던 날, 어머니는 말없이 우셨고 아버지는 한숨을 쉬셨다. 몇 시간이 흐르고 술에 취해 내 방으로 찾아온 아버지가 ‘그래도 우리 조금만 더 힘을 내보자’ 라고 말하셨을 땐 나 역시 하염없이 울 수 밖에 없었다.


다만 그것은 감동이지 방법이 아니었다. 나 역시 가슴이 후련할 정도로 우는 것이 슬픈 일을 해결하는 데 한 갈래 중에 있음을 안다. 하지만 사실이 그렇듯 엉엉 운다는 것은 방법보다는 ‘방법’을 시작하기에 앞서 완벽하게 몸을 푸는 일에 가깝다. 나는 다시 그 약하고 연약해진 정신을 이끌고 학교에 도착했고, 나를 지긋이 관찰하던 담임선생님의 호출에 불려갔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얘기해보라는 그 따스한 호흡에 모든 것이 무장해제 되었다. 나는 사랑부터 우정까지 힘든 일에 대하여 모두 이야기했고 내 얘기에 마침표가 찍혔을 즈음 선생님은 나와 함께 울어주었다. 그렇게 힘든 일이 있는지 담임이 되어서조차 몰라 미안하다며 내 절반도 안되는 그 가련한 몸으로 나를 끌어안아 이해해주셨다. 선생님은 내게 다시는 이 정도로 슬프게 울 일은 만들지 말자며 내게 약속하자 했다.





자리는 학생이 채워가고, 그 자리를 유지시키는건 학생만의 일이 아니다.




그렇게 흐르고 흘러 졸업식 날, 학생 대표로 송사를 하며 중간중간 울컥함은 있었지만 조금씩 문장을 잘 이어나가던 중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엄지를 척 들어보이는 선생님의 웃음에 잡아왔던 끈을 놓고 참아왔던 눈물보를 허물었다. 약속을 어겼다는 생각에 조금 헛웃음이 났지만 나중에 말씀해주시기를 동시에 어겼다고 한다.

하늘에 장담컨대, 그 없이 나는 어쩌면 없었을 수도 있었다. 이만한 불효자식인 것을 부모님이 아신다면 세상 슬퍼하실 일이지만, 낳아주신 은혜나 가르쳐주신 은혜만큼이나 함께 울어주고 위로해준다는 것은 위대함을 깨달았다.


꼭 큰 사람 되겠다고 약속하던 졸업식 날, 선생님은 내게 또 말씀해주셨다.

그래, 지금보다 더 큰 사람이 되어
너의 그 큰 온몸으로 세상을 안아주고 또 나눠주거라.

세상이 어둡고 무거운 미로라는 점에는 변함없는 생각이지만 이 은혜를 다시 그때의 나를 만나 베풀기 전까지는 쓰러지면 안되겠다, 3월의 봄을 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글. 임주혁. 안아주고 나눠드립니다.
사진. 777크루 정준순.